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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디자인/홈스타일링 & 홈가드닝

모네 명화 패러디 보며 힐링해요

by goodhi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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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명화 패러디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작품에는 바다그림이 많다.

아마도 항구 도시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서 일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신혼생활 2년을 제외한 근 50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나는 왜 이리 바다가 그리운 것일까?

여전히 나는 바다가 보이는 집을 꿈꾸며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네의 바다 풍경 그림을 좋아한다.

 

클로드 모네, 푸르빌의 밀밭 길, 1882, 캔버스에 유채, 65x81cm

 

모네의 작품이다.

붉은 밀밭 너머로 푸르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명화 패러디

 

나는 어느새 밀밭 사이를 걷고 있다.

 

모네의 그림을 보니 바다에 가고 싶어 그림 속에 나를 넣었다.

바다를 보면 어김없이 발을 담그는 나이기에, 그림 속에서도 나는 바다에 가면 발을 담글 것이다.

 


모네 명화 패러디하기

이젤

 

모네의 작품을 보고 패러디를 해보기로 했다.

잘 그리는 그림 실력은 아닌데...

조각을 전공했기에 그림에 관심은 많다.

 

모네의 작품은 유화지만, 유화를 그려본 적이 없어 아크릴 물감으로 그렸다.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니 정말 명화는 다르구나 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명화 패러디

 

앤틱한 액자와 매치를 하니 조금은 그럴듯해 보여 뿌듯...

명화 패러디, 거실 인테리어
빈티지 인테리어

 

거실에 걸어놓으니 빈티지 소품들과 딥 그린 벽과도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은 내게 활력소를 주기도 한다.

벽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을 보며 바다를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본다.

 

본명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을 영국 해협의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외광 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다.
또한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 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다.

1860년 군대에 소집되어 1년간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했으며, 1862년 장티푸스에 걸려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곧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 밑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 등과 사귀며 공부했다.
이들의 우정은 새로운 생각과 열정이 반영된 미술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모네는 1870년 그의 모델이며 애인이었던 카미 유동 시외(Camille Doncieux)와 결혼했으며, 이어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등의 영국 풍경 화파의 작품들을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 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예술가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일출》을 출품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는 모네의 《인상, 일출》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 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은 대표적인 연작 작품이다.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잘 표현해낼 수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의 눈에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빛의 변화가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다.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모네의 시력은 크게 손상되었다.

모네는 1893년 지베르니에 정원을 넓힐 수 있는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연못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벽화작업에 착수했다.
《수련》연작은 모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이 그림들은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그림 그리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26년 86세를 일기로 지베르니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피디아 백과사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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